퇴근 후 첫 모금이 주는 그 감각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다가 저녁 7시쯤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은 찌뿌둥하고 머릿속은 아직 업무 메일이 맴돈다. 집에 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하나를 집는다. 집에 도착해서 옷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캔을 딴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뭔가 스위치가 꺼지는 느낌이 든다. 업무 모드에서 내 시간 모드로 전환되는 그 순간. 술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이 전환의 순간을 말하는 거다. 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긴장을 풀어내는 하나의 의식 같은 거다. 건강 기사에서는 맨날 술의 해악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적당히 마시는 사람 입장에서는 할 말이 좀 있다.

사람 사이 거리를 좁혀주는 윤활유
처음 보는 사람과 밥만 먹으면 대화가 뻣뻣하다. 서로 눈치 보면서 적당히 안전한 주제만 꺼낸다. 근데 거기에 소주 한 병이 올라오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꼭 취해야 그런 게 아니다. 한두 잔 정도면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면서 말투가 편해진다. “사실 저도 그거 힘들었어요”라는 말이 술 없으면 잘 안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술자리가 유독 많은 이유도 이거다. 회식 문화가 싫다는 사람도 많지만, 그 안에서 관계가 풀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도 분명 있다. 오랜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소주 기울이면서 근황 얘기하는 시간. 연인이랑 와인 한 잔 하면서 평소에 못 했던 이야기 꺼내는 밤. 이런 순간들은 술이 아니었으면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들이다. 물론 술 없이도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술이 그 문턱을 확 낮춰주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미각의 세계가 생각보다 깊다
술을 그냥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고 생각하면 꽤 많은 걸 놓치고 있는 셈이다. 와인 한 잔을 제대로 음미해보면 포도 품종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소비뇽 블랑인데 뉴질랜드산은 풀 향이 강하고 프랑스산은 미네랄 느낌이 난다. 위스키도 마찬가지다. 스카치와 버번은 아예 다른 술이라 해도 될 정도고, 숙성 연수에 따라 바닐라 향이 진해지거나 스모키한 맛이 올라온다.
맥주만 해도 라거, 에일, 스타우트, IPA 전부 다른 음료 수준으로 맛이 갈린다. 편의점 맥주만 마시다가 크래프트 맥주 전문점에 한번 가보면 세상이 넓다는 걸 체감한다. 안주와의 조합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치킨에 맥주가 국룰이라지만, 실제로 페일에일보다는 라거가 더 잘 어울리고, 스테이크에는 풀바디 레드와인이 고기의 감칠맛을 끌어올린다. 이런 조합을 하나씩 찾아가는 재미가 은근 크다.

혼술이 주는 의외의 위로
혼술이라고 하면 걱정부터 하는 시선이 있다. 혼자 마시면 알코올 의존이 되기 쉽다는 말도 맞긴 하다. 근데 실제로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좀 다르다. 퇴근 후 좋아하는 드라마 틀어놓고 맥주 한 캔 마시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이 꽤 많다. 아무한테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
특히 요즘처럼 사회적 피로도가 높은 시대에 혼술은 일종의 셀프 케어가 된다. 핵심은 양 조절이다. 캔맥주 한두 개, 와인 한두 잔 정도로 딱 기분 좋은 선에서 멈추는 거다. 만취까지 가면 다음 날 후회만 남지만, 살짝 얼굴이 달아오르는 정도에서 그치면 잠도 잘 오고 기분 전환도 된다. 혼자 마시면서 일기를 쓰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조합은 생각보다 감성적이고 회복력 있는 시간이 된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차원이 다르다
제주도 해변에서 마시는 맥주와 집 앞 편의점에서 마시는 맥주는 같은 맥주가 아니다. 장소가 바뀌면 술맛이 달라진다는 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 경험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본 이자카야에서 생맥주 한 잔 시키면서 튀김 안주를 먹는 그 분위기. 유럽 카페 테라스에서 낮술로 와인을 홀짝이는 오후. 이런 경험은 술 자체보다 그 순간 전체가 기억에 남는 거다.
국내 여행도 마찬가지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막걸리 한 사발, 부산 광안리에서 회에 소주, 강릉 카페거리에서 크래프트 맥주. 각 지역의 술과 음식을 즐기는 건 그 자체가 여행의 일부분이 된다. 주변에서도 여행 계획 짤 때 맛집만큼이나 술집을 찾아보는 사람이 많다. 술이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경험의 한 축이 되는 셈이다.
근데 여기서 선 하나는 지켜야 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술 예찬론처럼 보일 수 있는데,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다. 이 모든 좋은 점은 적당량일 때만 성립한다. 맥주 한두 캔이 세 캔, 네 캔이 되고, 소주 반 병이 두 병이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숙취는 기본이고, 습관적으로 양이 늘면 간 수치가 올라가고 수면의 질은 오히려 떨어진다. 술이 잠을 재워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알코올은 깊은 수면을 방해한다. 그래서 술 마신 다음 날 개운하지 않은 거다.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안전한 음주량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술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은 하기 어렵다. 다만 적당히 마시면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미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건 삶의 질과 관련된 문제다. 건강 하나만 놓고 보면 안 마시는 게 맞지만, 사람이 건강만으로 사는 건 아니니까. 자기만의 적정선을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 두 잔까지는 기분이 좋고 세 잔부터 후회가 시작된다면, 그 선을 지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늘 퇴근길에 맥주 한 캔 사서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마셔보자. 거창한 이유 없이, 그냥 하루 수고했다는 의미로. 그 한 캔이 주는 작은 위로가 술이 좋은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